수묵, 인생에 스미다

충북대학교 오송규 교수는 수묵화를 그리기 시작한 지 30년 만에 “비로소 이제 조금 먹색을 다룰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변덕도 심하고 어디로 번질지 어떻게 변할지 예측도 안되기에, 아직도 ‘먹’은 까다로운 여자친구 같다지만, 기자는 오송규 교수의 작품에서 처음으로 먹의 색채를 봤다.

그라폴리오에서 아트 디렉터를 맡고 있는 아티스트 PJ.Kim. 어느날 그가 은사님을 뵈러 간다면서 동양화 작가인 오송규 교수님 이야기를 꺼냈다. 고등학교 때 계원예고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는 것. 그 어느 작가보다 다양하고 조화롭게 색채를 구사하는 PJ. Kim과 동양화는 파스타와 김치처럼 낯선 조합이었기에 더욱 흥미가 생겼다. 충북대학교로 가는 그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먹과의 오롯한 30년 동반 인생길

충북대학교 미술과 건물에 있는 오송규 교수님의 연구실은 작가이면서 동시에 학자의 방이다. 긴 벽을 차지한 책장에는 동양미술 뿐 아니라 세계 미술에 관한 연구서들과 각종 에세이들이 빼곡했다.
다른 편 벽에는 커다란 작품 두 점. 요즘은 동양화도 ‘현대적인 동양화’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서양화에서 구사하는 것 이상의 색채를 구사하고, 형이상학적 형태의 작품도 많이 그린다고 하는데, 오송규 교수의 작품은 정직하게 먹과 물만으로 산수를 표현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우연히 본 미술선생님의 동양화에 반했어요. 하지만 당시 화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달력에 나온 수묵화만 따라 그리다가 미대로 진학했죠.”
홍익대 미대인 만큼 동기들 가운데는 국전 당선자도 있는 등, 이미 대부분이 대단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기가 많이 죽었지만 그는 꿋꿋이 한 길만 바라봤다.
“학교에서 교수님이 ‘먹맛’이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리고 먹에는 여섯 가지 색채가 있다는 말도. 그때는 그게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곧 수묵화만 그려가며 그 ‘먹맛’, ‘먹색’, ‘먹빛’을 찾아내려 애썼다.

“30년을 그리고 나서야 조금 먹맛을 알 수 있게 됐습니다. 밤도 새까만 밤이 있고, 어스름한 밤도 있듯이, 먹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농담(濃淡)도 나타나고, 먹색의 맑고 탁함이 다르죠.”

오송규 교수의 작품 스타일은 특별하다. 사물의 형상 묘사가 아니라 먹 위에 빗금 형태로 물을 덧칠하는 것.
“빗금을 치는 듯한 현재의 스타일이 나온 건 2006년부터입니다. 그 전의 작품은 사실 보여주고 싶지 않을 만큼 부끄러워요. 대학 입학 때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계원예고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13년을 포함해 한 20년 쯤은 작품 창작보다는 그냥 공부했던 시기나 다름없어요.”

모든 색의 시작과 끝

그는 연구실을 나와 작업실을 소개하겠다며 앞장섰다. 전시회 준비 막바지라 조금 복잡할 거라는 이야기를 덧붙이며 작업실 문을 열었다. 순간, 세상에서 가장 겸손하면서 고요한 먹향이 음악처럼 코로 감겼다. 그리고 웅장하고 장엄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누가 우리말에는 색채표현 어휘가 풍부하다 했던가. 말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오직 먹과 종이만으로 만들어내는 수많은 색이 유장하고 유유히 흐르는 느낌이었다. 작업실 전체가 울창한 수풀 같기도, 혹은 하나의 작품 같기도 했다.

잠시 멍하니 있는데, 오송규 교수가 기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먹색은 본래의 색”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세상의 색을 모두 섞으면 검정색이 되고, 그걸 다시 환원시키면 모든 색이 나옵니다. 즉, 먹은 색이 있기 전의 처음 색이고, 동시에 모든 색의 마지막이죠. 때문에 사람에 따라 그 모든 것이 보일 수도 있고, 아무것도 없이 그냥 까만 것만 보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작품에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것들, 예컨대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을 담으려고 노력합니다”

밤에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듯, 수묵화의 검은 빛은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다.
“보이는 것을 모두 보여주려고 하면 많은 것을 담아내지 못해요. 그러나 먹은 눈으로 보이지 않기에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일종의 그릇인 것이죠. 그 그릇에 무엇을 담을지는 관람자의 몫입니다. 무한한 사유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상상하는 게 바로 수묵화 감상법입니다.”

생각해보니 사실 그랬다. 전시회에서는 관람자에게 감상에 대한 정답을 강요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자기 생각이 틀렸을까봐 함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수묵화는 관람자에 따라 마음껏 상상하면 되는 것.
“예술에는 답이 없어요. 내가 좋아야 명화인거지, 내가 불쾌하면 명화가 아니죠. 매스컴에서 내세우는 보편성은 매스컴의 남용과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먹빛은 세 번 변한다

먹을 다루기 어려운 이유는 그 색을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벼루에 먹을 갈아도 눈으로 봐서는 그게 어떤 색이 나올지 확신할 수 없다. 그것을 화선지에 그려봤을 때, 종이에 먹빛이 스미면 그 때 첫 번째 먹빛이 나타난다.
그 먹빛이 마르면 처음과는 다른 두 번째 색이 나타난다. 그리고 얇은 화선지를 두꺼운 종이에 대고 팽팽하게 해서 아교로 붙이는 배접을 하고 나면 색이 또 바뀐다.

“동양화에서 가장 어려운 게 이 부분이죠. 처음 붓을 들면서 배접까지 끝냈을 때 나올 색을 예상해 보지만 빗나갈 때가 많아요. 그리고 번지는 것도 제 예상을 번번히 빗나가곤 하죠.”
붓을 떼고, 번져가는 먹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내가 의도한 방향으로, 딱 그만큼만 번져주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고. 때로는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번져서 안타깝지만 그 역시 자연의 특성이 아니겠냐며 웃는다.

PJ. Kim도 덧붙인다.
“저에게 동양화는 제 컨트롤을 넘어선다는 점이 어려웠어요. 펜으로 테두리를 그리면 그대로 나오지만 화선지에 그리면 예상 못한 방향으로 번져버리고, 벼루에 먹을 갈아 쓰기 때문에 매번 색도 다르죠. 게다가 어떤 색을 예상하며 칠했는데 다른 색으로 발색이 돼 버리기도 부지기수. 이를 통제하기 위해선 수많은 경험과 실패를 통해 감(感)을 가져야 하는데, 저는 급하고 인내심 없는 성격이라 답답했었죠.”

오송규 교수는 웃으며 덧붙인다.
“화선지라는 재료는 너무나 엄격해요. 서양 채색화는 좀 틀려도, 더 진한 색으로 덧칠하면 아래색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수묵화는 달라서, 마치 포토샵 프로그램의 히스토리처럼 그 붓질 하나하나가 다 드러나요. 쉽게 말해 복기가 안 된다고 할까? 감추고 싶지만 감출 수 없기에 조금 실수해도 처음부터 다시 그릴 수밖에 없죠. 그래서 매 순간 긴장해야 하며, 인내심도 많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송규 교수는 아직도 하얀 화선지를 앞에 두고 첫 먹을 떨어뜨리는 게 두렵다고 한다. 완전히 마음이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느라 한두 달 쯤을 훌쩍 보내기도 한다.

그림에 담은 삶, 사람, 생활, 우주, 자연

오송규 교수의 작품 속 자연은 눈보다는 가슴에 먼저 와 닿는 자연이다. 저기가 어딜까 궁금하기 보다는 저런 곳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여행에서 본 특정 장소를 스케치해 그리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여행 중엔 사진을 많이 찍지만, 그것을 그대로 보고 그리지는 않아요. 제 기억과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요. 그 동안 살아오면서 봐왔던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들을 조합해서 표현하는 것이죠. 그러다보니 구체적인 사물의 형태보다는 수묵의 느낌이나 맛을 표현하게 됩니다.”

오송규 교수는 요즘 4년 만에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전에는 전시를 하고 싶지 않은 작품인데도 일정이 잡혀져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쫓기듯 한 적도 있었죠. 그러나 내가 준비돼 있지 않으면 그 기회를 제대로 활용할 수 없는 것. 그래서 이번에는 성실하게 꾸준히 작업해 왔습니다”

성실하고 꾸준한 것은 느리다. 물론 느리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그 안은 깊다. 유속이 느린 강물이 더 깊은 것을 생각해보면 될 것이다.
“급한 것은 몸이 먼저 나간다는 것이고, 느리다는 것은 많은 생각을 갖고 나가는 것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느리게 가면 실수를 알아채고 고칠 수 있는 여유도 있으니, 생각은 좀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요? 사람한테 다가가는 마음도 느릴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마음에도 관성의 법칙이 있을진대, 빨리 다가가면 그만큼 빨리 멀어지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내 삶의 두 가지 꿈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이라도 맑은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다짐했다는 오송규 교수. 그의 책꽂이에는 유독 법정스님의 에세이가 많다.
“그 분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저도 정화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 '무소유'로 살기란 불가능하지만, 그것을 지향하며 사는 것도 가치가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법정 스님이 자연스러운 삶에 대한 열망을 글로 담아냈듯, 오송규 교수는 그 해답을 수묵에 담았다.
“수묵. 그 자체가 바로 자연성이 아닐까요? 화선지에 수묵이 한번 스며들기 시작하면 통제하지 못하죠. 자연 역시 그래요. 산을 정복했다고들 말하는 데, 그건 잘못된 표현입니다. 그건 정복이 아니라, 그냥 스쳐가는 것일 뿐. 산을 어떻게 인간이 이길 수 있겠어요?”

그에게 꿈은 단 두 가지다.
“언제까지고 계속 작업하는 게 꿈이에요. 그 과정에서 교수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는데, 교수가 됐으니 한 가지는 이룬 셈이네요. 나머지 꿈은 산 속 아름다운 곳에 음악감상실과 연주실이 딸린 작업실을 짓고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사는 겁니다. 제자나 좋은 친구들이 놀러와서 같이 지내며 그림을 그렸으면 해요.”

오송규 교수는 요즘 특별한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입학한 학생들에게 인문학 분야 도서 한 권씩을 모두 선물하려고 책을 고르는 중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 그냥 시각적이고 감각적으로만 그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담아야 비로소 감동을 주는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 역시 인문학 전공자가 아니어서 책을 고르는 일이 쉽지는 않네요.(웃음)”

‘현대적 동양화’의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깊은 나무처럼, 오직 먹과 물과 종이에 산수를 담아온 그의 작품은 이제 높은 산 위 독야청청하는 소나무처럼 ‘오송규’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하나의 세계가 됐다.


프로필
오송규(Oh, Song-gyu)
전북 정읍 출생
정읍고등학교 졸업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홍익대학교 대학원 동양화과 졸업

2010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
2010 소사벌 미술대전 운영위원
2010 도솔미술대전 심사위원
2010 충북미술대전 운영위원
2009 온고을 미술대전 심사위원
2005 관악 현대미술대전 운영위원
2002 소사벌 미술대전 운영위원

現 충북대학교 인문대학 미술과 교수
한국미술협회 이사, 한국예술철학회 이사
한국미술협회, 서울미술협회, 시공회, 한국예술철학회 회원. 동방현대채묵화회원

E-mail: sunve@hanmail.net

전시회
개인전
2011 19회 개인전 '수묵-먹빛에 스미다' (인사아트센터)
2010 18회 개인전 NAAF 2010 In Tokyo (선샤인시티 / 동경)
2009 17회 개인전 - 알토아트페어부산 (해운대 펜텀호텔)
2008 16회 개인전 동경현대미술제 (동경 도립산업무역센터 / 동경)
2007 15회 개인전 북경 798 현대미술제 (북경 798 art zone / 북경)
2007 14회 개인전 - 기획 초대전 (갤러리 I)
2007 13회 개인전 NAAF 2007 (서일본 컨벤션센터, 기타큐슈 / 일본)
2006 12회 개인전 - 기획 초대전 (갤러리 정)
2006 11회 개인전 - 마니프 초대 / 2006 아트서울전 (예술의 전당)
2005 10회 개인전 - 시공회 기획 (단원미술관, 안산)
2005 9회 개인전 - 마니프초대 / 2005 아트서울전 (예술의 전당)
2004 8회 개인전 - 기획초대전 (우봉미술관 / 대구)
2004 7회 개인전 - 마니프초대 / 2004 아트서울전 (예술의 전당)
2002 6회 개인전 대한민국 미술축전 초대 (예술의 전당)
2002 5회 개인전 (종로갤러리)
2001 4회 개인전 시공회 대기획 '다양성의 세기관-그 조화와 균형' (서울시립미술관)
1999 3회 개인전 (덕원미술관)
1994 2회 개인전 (청남아트갤러리)
1993 1회 개인전 (공평아트센터)

외 다수의 단체전

오송규 갤러리


소요유(逍遙遊)
150 X 90cm/화선지에 수묵/2011



수류화개(水流花開)
120X90cm/화선지에 수묵/2011



어느맑은날
73X53cm/화선지에 수묵/2010



섬진강 인상
150X54cm/화선지에 수묵/2011



관조(觀照)
126X69cm/화선지에 수묵/2011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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