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션 플레이백
세상의 모든 이가 플레이백을 플레이백 할 때까지…

플레이백(Play Back) ①재생. 테이프나 레코드(LP disc), 콤팩트 디스크처럼 반복 사용할 수 있는 기록매체를 듣는 것 / ②녹음기나 VTR 등에서는 테이프의 조작을 정방향과 반대로 되돌리는 것. 즉 ‘역전’시키는 것.



플레이백 인터뷰를 하러 가기 전, 언제나처럼 그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봤다. 사전적 의미가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2008년부터 조금씩 발매해 온 그의 세 장의 앨범이 검색됐다. 일반적인 댄스 음악처럼 강렬한 사운드를 채택하면서 R&B의 감미로운 멜로디, 그리고 힙합 같은 창법을 더한 그의 음악에는 묘한 끌림이 있었다.

도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그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길, 머릿속엔 내내 그래피티가 어지럽고, 온갖 악기가 아무렇게나 자리잡고 있는 작업실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망원동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은 - 남성에게 좀 미안한 표현을 빌리자면 - 매우 깔끔하면서 아기자기한 공간이었다. 홍대 디자인샵에서 사온 듯한 소품과 피규어가 빈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벽에는 그가 좋아하는 뮤지션의 앨범들이 레코드 가게 진열대처럼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그리고 각종 악기가 즐비할 것이란 상상을 깨고, PC와 각종 전자기기만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작업실 분위기가 말해주듯 플레이백은 유쾌한 사람이었다. 굳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음악으로 표현할 필요도 없을만치 위트있게 말도 잘했다.

그가 음악을 하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당시 유행했던 팝 음악과 서태지씨 음악을 들으며 막연히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음악을 듣고, 자신의 길을 찾아내던 순간의 떨림과 여운을 가슴 속에 꼭꼭 채웠던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기어이 작곡가의 길로 들어선다.

어떤 음악이 자기와 맞을지 고민하며 이것저것 여러 작업들을 하던 차, 2001년 캐나다에 다녀온 친구가 CD 두 장을 내밀었다. 조(Joe Lewis Thomas)와 크레이그 데이빗(Craig David). “당시 한국의 주류는 댄스였는데, 둘의 음악은 상당히 매력적이고 특별한 장르였어요. 커다란 사운드가 쿵쾅거리며 심장을 뒤흔드는데, 멜로디는 발라드 음악처럼 가슴을 휘어잡았죠. 그 음악에 이끌려 제가 지향하는 음악을 정했습니다.”

“새로운 장비를 들여놓을 때도, 장비를 사기 전에 인터넷에서 장비의 매뉴얼을 구해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꼼꼼히 읽어봅니다. 그리고 이걸 사면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까지 다 하고 난 후에 장비를 구매하죠.” 매뉴얼을 얼마나 꼼꼼히 읽었는지, 따로 장비 사용법을 누군가에게 배운 적도 없다고.

그는 마이클 잭슨을 존경한다면서 더불어 마이클 잭슨, 어셔, 바비브라운, 앨범을 프로듀싱했던 테디 라일리와 알켈리를 언급했다. 노래와 댄스를 앞세워 마이클 잭슨이 되기보다는 자신의 곡으로 제2의 마이클 잭슨을 만들어 내고 싶어하는 그의 꿈은 어쩌면 ‘월드스타’보다 더 멋진 꿈인지 모른다.







그는 현재 혼자서 작곡을 하고 앨범을 제작해 디지털로 발표하고 있다. 지난해 발매한 앨범 'Purple Kiss'의 경우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일을 ‘1인 창조 레이블’이라면서 온라인의 발달로 음반 발표가 쉬워짐에 따라 앞으로 크게 성장 가능성 있는 시장이라고 덧붙였다.

그렇다면 1인 창조 레이블의 장점은 뭐가 있을가? “덩치가 큰 회사일수록 비용도 많이 들고, 리스크의 영향도 커집니다. 그러나 혼자서 하면 리스크에 대한 부담도 적고,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유연성도 쉽게 발휘할 수 있죠.” 물론 시스템적 편의와는 별개로 창작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능력을 다 갖출 수는 없기에 장벽도 많다. 때문에 플레이백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일을 하는 1인 창조 레이블 아티스트끼리 서로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을 들으며 거대 엔터테인먼트사가 잠식하고 있는 음반시장이 이제 다시 실력을 앞세운 뮤지션에게 돌아갈 때가 머지 않았다는 예감을 하게 됐다. 놀랍게도 그는 정식으로 음악이론을 공부한 적이 없다. 음악대학은 물론, 학원도 다닌 적이 없는데 MPC라는 샘플링/드럼머신과 음악제작 프로그램들, 각종 음악 장비들을 독학해서 분신처럼 사용하는 모습이 인상깊었다.

따지고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작했으니 시작도 늦은 편. 그런 그를 여기까지 있게 한 원동력은 무얼까? 언젠가 읽은 책에 의하면, 유독 음악가 가운데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낸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창작의 고통으로 미치광이가 되거나 요절하거나 귀머거리가 되거나 이명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음악가’, 특히 ‘작곡가’라 하면 왠지 우울해 보였고, 손가락이 부르트거나 손마디에 굳은 살이 박히도록,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연습해야 비로소 음악가가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플레이백은 “아직까지 이 일을 하면서 지겹다거나 재미없었던 적이 없다”며 웃는다. 그에게 음악에 대한 흥미와 열정이야 말로, 신이 주신 절대음감보다 더 고마운 선물임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어떤 음악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친구가 캐나다에서 조와 크레잇 데이빗의 CD를 갖고 와서 내 앞에 그 음악을 펼치던 순간을 기억합니다. 만약, 그 날이 없었다면 저는 한참 후에나 그들의 음악을 들었거나 혹은 아직까지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죠. 그와 나는 지구 반대편에 있고, 말 한마디 나눠보기는커녕, 평생 만나기도 어려운 사이잖아요. 그러나 노래 하나로 그와 소통이 된다는 게 정말 신기했어요. 그 때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을 만들어주고 싶어요.

요즘 2NE1의 ‘박수쳐’ 가사에 ‘음악으로 지구를 흔들어’라는 가사가 있는데, 그게 딱 제 꿈이고 소명이죠. 미국이나 일본 같은 음악선진국처럼 우리 음악시장에서도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작곡가가 많았으면 해요."

일반적 재생 외에 되감기를 플레이백이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되감지 않으면 플레이 할 수 없듯이, 되감기와 재생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고 지금 그의 연주는 단순히 플레이 되는 것이 아니라, 외모와 퍼포먼스로 얼룩져가는 국내 음반시장을 실력 위주의 시장으로 서서히 역전시키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와의 인터뷰가 끝나고 나오면서 사전에서 찾아본 두 가지 의미 중에 ‘플레이백’의 뜻을 굳이 두 번째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어진 이유가 여기 있다.










Profile
1998 cakewalk라는 프로그램으로 미디입문
2000 음악장비 구입
2008 디지털싱글 발표 "exchange"
2010 디지털싱글 발표 "purple kiss"
2010 디지털싱글 발표 "88세대" /파라나듀오
2010 김정엽 앨범 참여/작곡 작사
2011 그라폴리오 BGM 콜라보레이션

미투데이_ http://me2day.net/dr2080
이메일_ dr2080@nate.com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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