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전병구
불평 없는 일상의 온화한 기록

2년 전 지방의 카페 안에서 함께 전시할 때만 해도 그는 애송이 냄새 풀풀 나는 학생 신분을 막 벗어난 풋내기 화가이지 친한 동생에 불과했다. 그 뒤로 난 전시로 바빴고 해외 이곳 저곳을 돌며 몇 통의 전화로 그와의 친분을 이어 가고 있었다.


얼마 전 우연히 수원에 들렀다가 그의 작업실이 근처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해봤다. 마침 그는 작업실에 있었다.

1년 만에 보는 그는 변함없이 순수한 느낌 그대로 나를 맞았다. 아담한 그의 작업실에는 이젤 하나와 조그만 책상, 앙상한 간이의자. 그 외 물건이라곤 그림이 전부였다. 벽면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그림들이 족히 60점은 돼 보였다.

그림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는 안부도 제대로 묻지 않은 채 그림들의 비닐커버를 벗겨 여러 그림들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비닐 커버가 사라진 그림들을 하나 둘 늘어놓기 시작하자 추운 작업실에 온기가 도는 듯 했다.
그리 크지 않은 아담한 사이즈의 화폭에는 소외된 외로움의 기억들이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회색기 가득한 색들에 싸여 부드러운 온기를 품고(내뿜고) 있었다. 그는 이런 외로운 풍경들을 불평 불만 없는 시선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하고 묵묵하게 그려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그림을 구경하고는 나의 질문 공세가 쏟아졌다. 그는 2년간 쉬지 않고 다양한 일들을 해왔다. 병원에서 일하기도 하고 디자인 회사에서 시각 디자이너로도 있었단다. 일을 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어 이 많은 그림을 완성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현재 보유한 작품수가 무려 70점이라고 했다. 좀더 완성도를 더해 올해 안에 개인전을 열 생각이란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부분의 학생이 작가의 길을 걸을 때 그는 경제적인 이유로 다른 일과 작품활동을 병행해야 했다. 다양한 일을 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의 머리는 온통 그림으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평소 습관처럼 사진을 즐겨 찍는 것처럼, 자신의 무료한 일상 속에서 지금의 작품들을 찍어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다시 한 번 그의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최근에 본 어떤 작품보다도 순수한 영혼을 가진 그림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말 묘한 것은 밋밋해보이는 이 그림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것이다. 그가 찾아낸 일상의 조각들은 매일매일 지나쳐 버리는 일상의 작고 소중한 부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전병구 작가의 눈으로 본 일상의 기록들은 화려하지도 그렇다고 추하지도 않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의 스냅사진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이 지극히 개인적인 작업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습관적으로 지나쳐 버려 쉽게 기억에 남지 않는 일상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Family
oil on canvas_22.7x15.8_2010
일년에 몇 번은 입 속으로 털어넣게 되는 알약들이 모여있다. 어떤 약일까? 사람에 따라 감기약, 위장약, 소화제 등 어떤 약으로든 변할 수 있는 건 그가 갖는 색감의 중성적인 느낌 때문인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의 주관적인 색을 최대한 죽임으로써, 보는 사람이 풍경 자체에 보고싶은 색과 생각을 덧입히게 하는지도 모르겠다.


 

Arboretum
oil on canvas_25.8x17.9_2010




Drive
oil on canvas_25.8x17.9_2010




Flower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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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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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titled
oil on canvas_45.5x37.9_2010



# 프로필
전병구, Byungkoo Jeon
 
1985년생
블로그_ http://byungkoojeon.egloos.com/
이메일_ byungkoojeon@gmail.com
그라폴리오 페이지_ http://www.grafolio.net/painterbk

전시
2009 '헛소동(Much Ado About Nothing)', 갤러리AT, 남양주
2008 'Dual Controls', 갤러리 소굴, 서울
2005 석수시장프로젝트 'OPEN THE DOOR' , 보충 대리 공간 스톤앤워터, 안양



# 인터뷰

1. 비교적 작은 사이즈의 그림들을 주로 그리고 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일상생활에서 순간순간 마음에 스치는 장면들을 스냅사진으로 기록하고 그 중 몇몇 사진들을 다시 유화를 이용해서 재현하는 방법을 쓴다. 우리가 보통 찍는 스냅사진들은 사이즈 자체가 크지 않는 편이고 개인적인 기록의 의미가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은 사이즈의 그림들이 그런 느낌들을 좀 더 잘 살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2. 그럼 계속 작은 그림들을 계속할 생각인가?

요즘은 내 작업에 있어서 형식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변화와 실험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면서 큰 사이즈 작업에 관해 고민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가장 작은 사이즈에서 큰 사이즈의 그림까지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작가가 되고 싶기 때문에 큰 사이즈의 작업들 역시 큰 기대를 가지고 작업에 임할 예정이다.
 
3. 작품의 내용이 모두 다른데.

작품의 내용을 결정짓는 소재뿐만 아니라, 작업을 하면서 어떤 기법 같은 것에도 얽매이지 말자고 항상 생각한다. 어떤 소재든 어떤 기법이든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가장 매력적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면 뭐든 활용하고 싶다.
 
4. 비교적 부드럽고 약한 색감들을 주로 사용한다. 이런 색감을 고집하는 이유가 있다면?

이미 찍힌 사진들은 지나가 버린 과거라고 볼 수 있다. 과거를 그리면서 지나치게 현실감 있는 색감이나 기법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실제 같는냐는 내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결핍된 색이나 생략되는 형태들을 통해서 더욱더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 요즘 자신의 이슈는?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작업을 하고 있나?

항상 조금씩 변하기 마련이지만 요즘 들어 그림을 그리는 테크닉에 대한 고민이 많다.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을 손이 따라와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리감이 힘들다. 또한 앞서 말한 것처럼 특별한 소재나 기법에 얽매이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표면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제 스스로 제 안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다.

6. 특별히 유화를 고집하는 이유는?

미술을 시작하기 전부터 드가나,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좋아했는데 그들이 썼던 유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유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색의 채도 조절이나 형태의 생략, 강조 등을 활용해 감정이나 주관을 가장 많이 개입시킬 수 있고 구사할 수 있다. 화풍의 폭이 넓은 것이 유화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6. 앞으로의 작업(전시 등) 계획이 있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법이나 사이즈, 형식적인 면에서 좀 더 많은 실험을 계획하고 있다. 전시에 대해서는 스스로 소극적인 면이 있었는데 올해 하반기부터는 적극적으로 공모나 단체에 참여해 외부와의 소통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얻고 싶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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